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쓸쓸한 애절한 홍국영의 최후 정조 이산 최측근에서 보필한 실권자

by $%@66 2021. 12. 2.
반응형

쓸쓸한 애절한 홍국영의 최후 정조 이산 최측근에서 보필한 실권자

 

홍국영 인물
정조를 최측근에서 보필한 최고 실권자

[ 洪國榮 ]

출생 - 사망
1748 ~ 1781

천하 모든 일이 내 손아귀에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

 

이 시대 정치 무대에서 짧지만 크게 활약한 인물로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이 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 대부분에서 그는 정조를 보필하여 개혁을 추진한 인물, 뛰어난 지략으로 정치판을 새롭게 짠 인물 등으로 꽤 비중 있게 등장한다.


조선의 영조,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 제법 많았다. 붕당(朋黨) 정치의 물고 물리는 권력 다툼 속에 탕평책이 펼쳐지는가 하면 사도세자의 비극적 최후가 있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노력과 규장각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인재들이 있었으며, 문화적 중흥의 기운도 있었다. 

 


그런 홍국영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평가, 특히 그가 출세하기 전 시절에 대한 평가는 어떠했을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심낙수의 [은파산고]에 따르면, 홍국영은 용모가 준수하고 눈치가 빠르며 수완이 좋아 임기응변에 능했다.

 

 자신이 글을 잘한다고 자부했으며, 실제로도 글에 재치가 있고 예리하면서도 자연스럽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격이 방종하여 술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모여 놀거나 얘기하기를 즐기고, 장기와 같은 잡기를 좋아했으며 시조와 창에도 능했다. 이 때문에 집안 어른들이 그를 질책할 때가 많았고, 명문가에서는 홍국영과 교유하려 하지 않았다 한다.

정치적 친소 관계나 상황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는 크게 윤색되거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평가들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홍국영이 학문에 전념하고 행실도 착실한 ‘모범생’ 사대부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친구들에게 ‘천하 모든 일이 내 손아귀에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 장담하고 다녔다는 이야기에서, 그가 일찍부터 정치적 포부를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얼굴 잘 생기고 다방면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는 재기 넘치고 자유분방한 젊은이, 그러면서 미래에 대한 포부도 큰 청년’이었던 셈이다.


권력을 휘두르며 스스로 외척이 된 홍국영
홍국영은 1776년 3월 정조가 즉위한 지 며칠 만에 국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측근 비서, 즉 승지에 임명되었고 몇 달 후에는 도승지(오늘날의 대통령실장)가 되었다.

 

 정조는 또한 친위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궁궐에 설치한 숙위소(宿衛所)의 대장으로 홍국영을 임명하고 훈련대장, 금위대장 등도 맡게 했다. 

 

궁 안에 머물면서 왕의 경호부대를 지휘하고 훈련대장으로 군권까지 장악했으니, 국정의 주요 사안은 홍국영을 거치지 않으면 정조에게 보고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정조는 즉위 직후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에 대한 두터운 신임을 거리낌 없이 밝혔다.

홍국영은 홍인한, 정후겸, 윤양후, 홍계능 등을 사도세자에 대해 불경했으며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죄를 물어 숙청했다. 뿐만 아니라 정조의 외척 홍봉한 집안도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 제거했다.

 

 정순왕대비의 친동생 김귀주도 유배시키고 그 세력을 무너뜨렸다. 외척 세력을 배격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뜻을 실행하는 행동대장이 홍국영의 모습이었다. 그런 홍국영은 1778년(정조 2)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원빈(元嬪) 홍씨다. 정조에게 소생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로써 홍국영은 정조의 외척이 되었다.

그러나 원빈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이듬해 5월 세상을 떠났다. 서인 세력 특히 노론은 국혼물실(國婚勿失), 즉 왕실과의 혼사를 놓치지 않는다는 정략적 원칙을 지켜왔는데, 홍국영은 이러한 정략을 따랐던 것이다. 원빈이 죽은 다음에도 홍국영의 야심은 그칠 줄 몰랐다.

 

 홍국영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인 이담(李湛)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으로 봉하여, 정조의 후계로 삼고자 했다. ‘완’은 전주 이씨, ‘풍’은 풍산 홍씨의 본관을 뜻하는데, 왕실 작호에 어머니 쪽 본관을 쓴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파격이자 홍국영의 야심을 반영한 처사였다.


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 - 정조의 두터운 신임

 


홍국영이 그렇게 자신감 넘칠 수 있었던 요인에는 가문적 배경도 있었다. 본관이 풍산인 홍국영 가문은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서울에 깊이 뿌리 내린 가문이었다. 홍국영의 6대조 홍주원은 선조의 딸 정명공주의 남편, 즉 부마 영안위(永安尉)였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사도세자의 장인, 정조의 외조)은 홍국영에게 10촌 할아버지가 되며, 정조와도 멀기는 하지만 12촌 관계가 된다. 또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8촌 관계인 경주 김씨 가문 김면주의 어머니가 홍국영의 당고모(5촌)였다. 집이 도성 바깥 서강에 있었던 홍국영은 과거를 보기 위해 도성에 들어왔을 때 김면주의 집에서 기숙했다.

홍국영이 1772년(영조 48) 25세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왕 가까이서 일하는 예문관원(사관)이 되고 동궁을 보좌하는 춘방사서가 된 것에는, 이러한 가문 배경의 영향도 있었다. 영조가 홍국영을 아끼며 ‘내 손자다’라고까지 했다는 것도 이런 배경에 힘입은 일이었다. 

 

그러나 홍국영은 어떤 정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기 주변에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키우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로지 정조밖에 없었다. 정조의 뜻이 곧 자신의 뜻이며,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뜻이었다.

정조가 홍국영을 신임하게 된 까닭은 빠르고 정확한 정세 판단과 정치적 감각 외에, 당쟁에 물들지 않고 파벌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도 있었다. 

 

또한 홍국영은 궁궐 바깥 세상의 실상을 정조에게 알려주는 역할에도 충실했다. 정조가 시중의 여론과 상황을 가감 없이 접할 수 있는 소통 창구가 바로 홍국영이었던 것. 홍국영은 정조의 기대와 신임에 부응하여 외척인 홍인한과 정후겸(정조의 고모 화완옹주의 양자) 세력에 맞서 정조의 대리청정을 성사시켰다. 

 

즉위 뒤 정조는 홍국영을 자신을 충직하게 보호한 ‘의리주인(義理主人)’으로 일컬으며 ‘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이산 화병 홍국영의 쓸쓸하고 애절한 최후 임박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야심가 홍국영의 최후가 임박했다.

 

 


중전 효의왕후(박은혜 분) 암살시도로 당대 최고의 권력자에서 옥살이 신세로 전락한 홍국영에게 정조는 모든 관직을 파하고 강릉으로 유배를 명했다. 조정중신들은 왕후 암살시도를 한 대역 죄인에게 지나치게 가벼운 처사라며 더 무거운 벌을 내리라고 요구하지만 정조는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면 목숨은 구명해야 한다”며 중신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6일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이산'(극본 김이영 / 연출 이병훈) 67회에서 마침내 홍국영(한상진 분)이 정조(이서진 분)로부터 귀양을 명받게 됐다.

대신 정조는 정순왕후(김여진 분)을 찾아가 홍국영을 이용해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며 “노론을 장악하고 있는 그 힘으로 조정대신들의 저 입부터 다물게 해라. 더 이상 어떤 일에도 나서지 마라”고 마지막 경고를 했다.


정조는 홍국영이 떠난 후 한참이나 숙위소 대장의 공석을 채우지 못하고 심란한 마음에 송연(한지민 분)을 찾았다. 송연은 정조에게 “홍국영을 용서하고 싶은 것”이라며 “죄는 용서할 수 없어도 사람은 용서하라”고 간언했다.


홍국영은 죄인의 신분으로 궁을 떠나기 직전 옷고름을 가다듬고 정조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홍국영이 저잣거리를 통과하자 백성들은 역적을 비난하며 돌을 던지기 까지 했다. “역적이 귀양 가는 길까지 배웅해줘야 하냐”고 쓰린 속내를 드러내던 서장보(서범식 분)은 이 모습을 보고 가슴을 쥐어짜며 홍국영에게 “고마웠노라”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한편 유배지에서 홍국영은 낮에는 낚시로 소일을 하며 밤에는 잠을 제대로 잠을 못자는 생활을 반복했다. 이때 근처에 원행을 나온 정조를 수행한 대수는 홍국영을 찾게되고 홍국영이 대접하는 소박한 밥과 찬을 보고 또 한번 격세지감에 울컥 했다. 홍국영은 대수에게 “나는 지금 화병을 앓고 있다.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말라”고 말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홍국영은 효의왕후가 여동생 원빈을 독살했다고 판단해 왕비의 음식에 독약을 넣는 극단적인 방법을 시도했다가 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집권 4년 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고향으로 쫓겨났다. 이후 화병을 얻어 유배생활 1년 만에 33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