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英祖
연잉군 초상.
영조 임금(재위 1724~1776년)의 연잉군(延礽君) 시절인 21세 때의 초상. 조선 1714년, 보물 제1491호. 1954년 화재로 일부 소실된 상태이다. 족자, 비단에 채색.
이칭 별칭
자 광숙(光叔), 호 양성헌(養性軒)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694년(숙종 20) ~ 1776년(영조 52)
조선 후기 제21대(재위:1724~1776) 왕.
개설
재위 1724∼1776. 이름은 이금,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 숙종의 세 아들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화경 숙빈 최 씨이다. 비는 서종제의 딸 정성왕후이고, 계비는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노론 유력자인 김창집(金昌集)의 종질녀로서 숙종 후궁이던 영빈(寧嬪) 김 씨의 양자 노릇을 하였다. 이로 인해 숙종 말년 왕위 계승문제가 표면화되었을 때, 이복형인 왕세자(후일의 경종)를 앞세우는 소론에 대립했던 노론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노론 측은 앞서 숙종 말년에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의 독대에서 논의된 대로, 연잉군을 경종의 후계자로 삼는 일에 착수하였다.
1721년 숙종이 승하하고 왕세자가 즉위해 경종이 되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고 또 아들이 없었다.
정언 이정소 의 세제 책봉 상소를 계기로 영의정 김창집·좌의정 이건명(李健命)·영중 추부사 이이명(李頤命)·판중추부사 조태채 등 이른바 노론 4 대신의 요구와, 이들과 연결되어 있던 왕실의 최고 존 장자인 대비 김 씨(숙종의 제2계 비인 人元王后)의 삼종 혈맥(三宗血脈) 논리의 지원을 받아, 연잉군이라는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경종의 뒤를 이을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삼종 혈맥이란 효종·현종·숙종에 걸치는 3대의 혈통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숙종의 유교(遺敎)라고 하는데, 여기에 따르면, 임금인 경종 외에는 연잉군밖에 없는 셈이 된다.(이복동생인 연령군은 숙종 말에 죽었음.)
소론은 왕권을 침해하는 불충이라 해 강하게 반발하였으며, 결국 대리청정론은 취소되고 김일경 등 소론 내 강경론자의 공격으로 노론세력이 일시에 정계에서 축출되어 소론 정권이 들어섰다.
조선 영조 가계도
유봉휘로 대표되는 소론 일부의 반발과 다른 후사를 물색하던 경종비 어씨(魚氏)의 불만이 없지는 않았으나, 왕세제로 책봉된 명분은 당당하였다. 그런데 노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임금이 병환 중이어서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우므로 휴양하도록 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를 받았고, 또 그들에 의해 왕세제의 자리에까지 올랐기 때문에 고립된 상태를 면할 수 없었다. 뒤이어 노론이 경종에게 반역행위를 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이른바 임인 삼수 옥(壬寅三手獄)이 발생하여, 노론 4 대신을 위시한 170여 명의 노론계 신하들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 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연잉군 역시 극히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처제인 서덕수나 인척관계에 있는 백망·정인중 등이 고문 때문인지는 모르나 역모를 자백해 처형되고, 자신까지 피의자의 공초에 오르내리게 되어 역모에 관련된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환관 박상검·문유도 등의 방해로 대궐 출입이 막히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이에 왕세제 자리의 사퇴를 걸고 이를 문제화 해, 결국 집권 소론으로 하여금 적대행위를 일삼는 환관·궁녀들을 처형하도록 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이후 보좌하는 동궁요속이던 김동필·조현명·송인명·박문수 등과 대비 및 경종의 보호로, 불안한 속에서도 세제의 자리를 지켜 1724년 경종의 죽음에 따라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었다.
왕위에 오른 직후 영조는 장차의 탕평책 시행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붕당의 폐해를 들어 붕당타파를 천명하였다. 영조가 탕평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은 아마도 세제로 책봉된 뒤일 것이다.
노소론 사이의 정쟁이야 숙종 때부터 계속되어 왔지만 그때는 자신과 별다른 관련이 없었으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에서부터 노 소론 간의 당론이 충역론으로 확산되면서 자신이 바로 그 정치적 소용돌이의 핵심에 처하여 생명까지 위협받는 경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위 직후 소론인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으로 영·좌의정을 삼고, 세제 책봉시 격렬하게 반대했던 유봉휘를 우의정으로 발탁하였다. 한편으로는 앞서 임인 삼수 옥 당시 자신을 모해하고 죄인으로 몰려고 했던 김일경 등 소론 과격파(急少)와 삼수 옥의 고변자인 목호룡을 처형하였다.
이어 즉위 초의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소론을 몰아내고, 자신의 지지세력인 노론을 정계로 불러들여 노론정권을 구성하면서 노론 4 대신을 위시하여 임인옥사에서 죽거나 처벌된 사람들의 죄를 모두 없애고 그 충절을 포상하는 을사 처분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의도했던 탕평정국과는 달리 정호·민진원 등의 노론당 로자들이 을사 처분과 환국에만 만족하지 않고, 나아가 소론에 대한 보복까지 요구하여 정국이 다시 노·소론 사이의 파쟁으로 흘러갔다. 1727년 갑자기 노론을 일시에 축출하고 이광좌를 수상으로 하는 소론 정권을 형성(이를 丁未換局이라 함)하면서 경종 연간의 건저(建儲)·대리(代理)를 역적의 행위로 규정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이 본궤도에 오르는 것은 1728년의 무신란을 겪고 나서였다. 애초에 영조의 반대편에 섰던 소론은 영조가 왕세제로서 경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대체로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이었으나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과격파(急少)들은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김일경이 처형되고 을사환국으로 노론 정권이 들어서서 일반 소론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이들이 숙종 20년의 갑술환국 때 노론에 의해 명의 죄인으로 몰려 정계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 일부를 규합해 무신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정미환국으로 집권하고 있던 이광좌·오명항(吳命恒) 등의 소론정권에 의해 조기에 진압되었으나 당쟁의 폐해로 변란까지 겪게 된 영조로서는, 붕당 타파에 의한 탕평의 실현이란 명분 하에, 노·소론에게 교대로 정권을 맡기는 환국 형태가 아닌 탕평 정국을 위한 새로운 정국운영방식을 모색해야만 하였다.
그것이 조문명(趙文命)·조현명 형제와 송인명에 의해 주장된, 권력구성에 노·소론을 안배해 함께 참여시킴으로써 공동정권을 구성하는 조제(調劑) 형태의 탕평책이었다. 이를 구체화하는 방법이 분등설(分等說)과 양치 양해(兩治兩解)·쌍거호대(雙擧互對)였다.
분등설은 노소론간의 충역 시비를 양시쌍비(兩是雙非) 논리에 의해 절충하여 양측 모두가 벼슬길에 나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다는 것이며, 양치 양해 역시 어느 한쪽을 죄주려면 반드시 다른 한쪽에 짝을 구하여 함께 벌함으로써 편파성을 극복한다는 내용이다.
쌍 거호 대란 인사정책으로, 예컨대 노론 홍치 중(洪致中)으로 영의정을 삼으면 소론 이태좌(李台佐)로 좌의정을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金在魯)를 맡기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 참의에 소론 서종옥(徐宗玉), 전랑에 노론 신만(申晩)으로 상대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에 의해 노·소론간에 충역 시비가 상반되는 경종 연간의 신축·임인옥사(흔히 辛壬獄事라 함)를 절충해 1729년의 이른바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내렸다. 소론계의 조문명·조현명, 송인명·서명균(徐明均) 등과 노론계의 홍치 중·김재로·조도빈(趙道彬) 등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파를 주축으로, 노·소론 간의 연합정권을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탕평 정국이 실현되었으며 이 바탕 위에서 영조의 왕권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이덕화 옷소매 붉은 끝동' 열풍 든든한 뿌리 활약
배우 이덕화가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극 대가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덕화는 MBC 금토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하 옷소매)'에서 영조 역을 맡아 매회 '미친 연기력'으로 안방 시청자들을 휘어잡았다.
'옷소매'에서 이덕화는 영조를 맡아 열연을 펼치고 있다. 그가 맡은 영조는 극중 천재적인 정치력으로 국정을 돌보는 성군인 동시에 아무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치명적인 역린을 가진 임금이다. 특히 세손 이산(이준호)을 향한 지나친 집착이 학대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극의 긴장감을 높이는 부분이다.
이덕화는 이산을 향한 영조의 '단짠단짠'을 세밀한 연기력으로 표현하며, 시청자들을 더욱 '옷소매'에 몰입하게 한다. 지난달 26일 방송된 5회에선 화완옹주(서효림)의 음해에 이산이 궐 밖에 나가 비행을 일삼는다고 오해하고, 동궁을 찾아가 이산의 뺨을 수차례 내리치며 "아비 같은 인간이 돼서는 안 된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27일 방송된 6회에선 이산을 불러 "할애비는 세상을 살면서 많은 잘못을 했다. 그 잘못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러나 매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라며 "넌 언젠가 임금의 자리에 앉아 날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게야"라며 진심을 전해 시청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오랜만에 사극으로 복귀한 이덕화는 '옷소매'에서 50년 연기 장인의 내공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덕화의 연기력은 '옷소매'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 이준호·이세영 등과 함께 '옷소매' 열풍을 견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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